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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쉰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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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카르 쉰들러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독일계 가톨릭 신자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의 군수업자였다. 그는 나치당과 아프베어의 일원이었으나, 유대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여, 유대인 학살로부터 1,200여 명을 구출했다. 쉰들러는 처음에는 사업적 이익을 위해 유대인 노동자를 고용했지만, 나치의 만행을 목격한 후 그들을 보호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자신의 공장을 군수 공장으로 지정받고, 거짓말과 뇌물을 통해 노동자들을 절멸 수용소로 보내는 것을 막았다. 쉰들러의 이야기는 소설과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그는 야드 바쉠으로부터 열방의 의인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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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르 쉰들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5년 이후의 오스카 쉰들러
1945년 이후의 쉰들러
본명오스카 쉰들러
출생일1908년 4월 28일
출생지츠비타우, 모라비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일1974년 10월 9일
사망지힐데스하임, 니더작센주, 서독
안장지시온산 가톨릭 묘지, 예루살렘, 이스라엘
직업기업인
배우자에밀리에 펠츨 (1928년 3월 6일 결혼)
자녀2명
정치 활동
정당주데텐 독일인당 (1935년–1939년)
나치당 (1939년–1945년)
수상
수상 내역열방의 의인
기타 수상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 훈장 1등급
묘지 좌표31°46′12.5″N 35°13′49.4″E
관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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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경력

오스카 쉰들러는 1908년 4월 2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이었던 모라비아의 츠비타우 (Zwittau|츠비타우de, 현 체코 스비타비 Svitavy|스비타비cs)에서 주데텐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농업 기계 공장을 운영하던 요한 "한스" 쉰들러였고, 어머니는 프란치스카 "패니" 쉰들러(결혼 전 성씨: 루저)였다. 1915년 여동생 엘프리데가 태어났다. 쉰들러가는 16세기 에서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주한 가문이었다.[3] 제1차 세계 대전 후 모라비아 지방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가 되었지만, 독일계였던 쉰들러는 체코슬로바키아보다 독일에 더 강한 정체성을 느꼈다.[4] 가정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가졌으나, 쉰들러 자신은 종교에 큰 관심이 없었다.[5] 근처 유대인 가족의 아이들은 그의 친구였다.

1915년 츠비타우의 국민학교(Volksschule)에 입학하여 실과 학교(Realschule), 상급 실과 김나지움(Höheres Realgymnasium)을 다녔으나, 1924년 성적 증명서 위조 혐의로 퇴학당했다. 나중에 복학이 허용되었지만, 대학 입학 자격 시험인 아비투어는 치르지 않았다. 대신 브르노에서 운전 및 기계 등 여러 직업 훈련 과정을 수료하고 3년간 아버지 밑에서 일했다. 젊은 시절부터 오토바이 애호가였던 그는 250cc 모토 구찌 레이싱 오토바이를 구입하여 그 후 몇 년 동안 산악 경주에 여가로 참가했다.

1927년 가을, 말레틴 (Alt Moletein|알트 몰레타인de, 현 체코 말레틴 Maletín|말레틴cs) 출신의 부유한 주데텐 독일인 농부의 딸인 에밀리 펠츨과 만났다.[9] 그녀는 쉰들러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두 사람은 1928년 3월 6일 츠비타우에서 결혼했다.[10] 결혼 후 7년간 오스카의 부모님 집 2층 방에서 함께 살았다. 에밀리에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쉰들러는 학창 시절 친구였던 아우렐리 슐레겔과 불륜 관계를 맺어 1933년 딸 에밀리, 1935년 아들 오스카 주니어를 낳았다. 쉰들러는 나중에 아들 오스카 주니어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11] 또한 1931년과 1932년에는 공공장소 음주로 여러 차례 체포되기도 했다. 1935년,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렸고, 어머니는 몇 달 후 오랜 병으로 사망했다.

결혼 직후 쉰들러는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모라비아 전기 기술 회사에서 일하거나 운전 학교를 운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에서 18개월간 복무하며 제31군 제10 보병 연대에서 하사 계급까지 진급했다.[7] 제대 후 모라비아 전기 기술 회사로 돌아갔으나 회사는 곧 파산했다. 아버지의 농기계 사업도 비슷한 시기에 문을 닫으면서 쉰들러는 1년 동안 실업 상태에 놓였다.[12] 1931년 프라하의 야로슬라프 시메크 은행에 취직하여 1938년까지 근무했다.[13]

1935년,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분리주의 정당인 주데텐 독일당에 가입했다.[14] 1936년에는 나치 독일의 군사 정보 기관인 아프베어의 첩보원이 되었다.[14] 그는 브레슬라우 (현 폴란드 브로츠와프)에 본부를 둔 ''아프베어스텔레 II 코만도 VIII''에 배속되었다. 훗날 체코 경찰에게는 만성적인 빚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첩보원이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의 임무는 철도, 군사 시설, 병력 이동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독일의 침략 계획에 대비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다른 첩보원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1938년 7월 18일, 첩보 활동 혐의로 체코 정부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1일 뮌헨 협정으로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병합되면서 정치범으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11월 1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을 신청했고, 이듬해인 1939년에 가입이 승인되었다.[15]

츠비타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쉰들러는 아프베어 부대의 부지휘관으로 승진했다. 1939년 1월, 아내 에밀리와 함께 체코-폴란드 국경 근처의 오스트라바 (Ostrau|오스트라우de)로 이주했다. 그해 3월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기 전까지 첩보 활동을 계속했으며, 아내 에밀리도 서류 작업과 비밀 문서 처리를 도왔다. 쉰들러는 사업차 폴란드를 자주 방문하면서, 계획된 폴란드 침공을 위해 자신과 25명의 요원들과 함께 폴란드 군사 활동과 철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독일군의 이동에 중요하다고 여겨진 야블룬코프 고개의 철도 노선과 터널을 감시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0년 가을까지 아프베어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터키로 파견되어 독일 대사관 소속 아프베어 장교들의 부패를 조사하기도 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독일 국방군 첩보부(아프베어)와 관계를 맺고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휘하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하던 오스카르 쉰들러는[14]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철도 관련 기밀 누설 혐의로 반역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1938년 10월 뮌헨 협정에 따른 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으로 사형 집행이 중단되었다. 1939년 2월 10일에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입당했으며,[15] 같은 해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맞춰 사업 기회를 찾아 폴란드 크라쿠프로 이주했다.

크라쿠프에서 쉰들러는 1939년 10월, 유대인이 소유했던 파산한 법랑 공장을 인수하여 '도이체 에마일바렌파브릭'(DEF, 속칭 '에말리아')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사업적 이익을 위해 유대인을 고용했으나, 점차 나치의 잔혹한 탄압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공장을 유대인 노동자들의 피난처로 삼기 시작했다. 그는 공장의 군수 공장 지위를 이용하여 친위대의 감시와 위협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했으며, 이들이 절멸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필수 인력이라고 주장하거나 기록을 조작하기도 했다.

1943년 3월 크라쿠프 게토가 해체되고 유대인들이 플라슈프 강제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자, 쉰들러는 수용소장 아몬 괴트를 설득하여 자신의 공장 부지 내에 비교적 안전한 하위 수용소를 마련하고 노동자들을 보호했다. 그는 암시장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는 등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해 노력했으며, 이러한 활동 과정에서 게슈타포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44년 말,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가 다가오자 플라슈프 수용소가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쉰들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인맥과 뇌물을 동원하여 공장과 약 1,200명의 유대인 노동자들을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네네츠로 이전시키는 허가를 얻어냈다. 이 과정에서 작성된 명단이 '쉰들러 리스트'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이 아우슈비츠로 잘못 이송되는 등 위기도 있었으나, 쉰들러의 노력으로 모두 브르네네츠로 옮겨져 보호받을 수 있었다.[16]

브르네네츠의 새 공장에서는 군수품 생산을 가장하여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 주력했다. 1945년 1월에는 혹한 속에 버려진 유대인들을 추가로 구조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의 보호 아래 있던 유대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생존할 수 있었으나, 쉰들러 자신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전 재산을 소진했다.

한편, 쉰들러의 동기에 대해 값싼 노동력 확보가 주 목적이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제기되었으나, 이러한 주장은 구체적인 근거 부족으로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3. 1. 크라쿠프 공장 운영

1939년 10월, 오스카르 쉰들러는 독일 국방군 첩보부(아프베어) 업무를 위해 폴란드 크라쿠프에 도착했고, 다음 달 아파트를 마련했다. 그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밀라 페퍼버그와 그녀의 아들 레오폴드 "폴데크" 페퍼버그를 알게 되었는데, 폴데크는 쉰들러의 암시장 거래 연락책이자 평생 친구가 되었다.

같은 해 11월, 쉰들러는 동료 요원의 회계사였던 이츠하크 슈테른을 소개받았다. 당시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 직후 유대인 소유의 재산을 몰수하고 시민권을 박탈하고 있었다. 쉰들러는 파산 신청한 유대인 소유의 법랑 공장 '레코드 유한회사' 인수에 관심을 보였고, 슈테른은 나치의 간섭에서 벗어나 유대인을 더 많이 고용하기 위해 회사를 신탁 관리하는 대신 직접 매입하거나 임대하라고 조언했다.

아브라함 뱅키어 등 여러 유대인 투자자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쉰들러는 1939년 11월 13일 공장 임대 계약을 비공식적으로 체결했고, 1940년 1월 15일 정식 계약을 맺었으며, 1942년 6월 26일에는 공장을 완전히 매입했다. 그는 공장 이름을 '도이체 에마일바렌파브릭'(Deutsche Emailwarenfabrik|도이체 에마일바렌파브리크de, 독일 법랑 공장), 약칭 DEF로 바꾸었으며, 이 공장은 곧 '에말리아'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대인 노동자 7명(뱅키어 포함)과 비유대인 폴란드인 250명을 고용했으나, 1944년 전성기에는 약 1,750명의 노동자를 고용했으며 이 중 1,000명이 유대인이었다.

2011년 크라쿠프에 있는 쉰들러의 공장


쉰들러는 아프베어 및 국방군과의 연줄을 이용해 군용 법랑 조리 기구 생산 계약을 따냈다. 이러한 관계는 훗날 그의 유대인 노동자들을 추방과 죽음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쉰들러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해 나치 관리들에게 점점 더 많은 뇌물암시장에서 구한 사치품을 제공해야 했다. 뱅키어는 암시장을 통해 뇌물용 물품과 공장 운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핵심 역할을 했다.

처음에 쉰들러는 사업적 이익을 위해 폴란드인보다 임금이 싼 유대인을 고용했다. 그러나 점차 나치의 만행을 목격하면서 비용에 상관없이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의 공장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사업체라는 지위는 유대인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방패가 되었다. '쉰들러 유대인'(Schindlerjuden)이 추방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쉰들러는 그들이 공장에 필수적인 인력이라고 주장하며 면제를 요청했다. 그는 여성, 어린이, 심지어 장애인까지 숙련된 기계공이나 금속 노동자라고 주장했다. 한번은 게슈타포가 위조 신분증을 가진 가족을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쉰들러는 그들을 술에 취하게 만들어 빈손으로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1940년 8월 1일, 총독 한스 프랑크는 크라쿠프의 모든 유대인에게 2주 안에 도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전쟁 관련 직업 종사자만 남을 수 있었다. 1941년 3월까지 약 15,000명의 유대인만이 남아 크라쿠프 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쉰들러의 노동자들은 매일 게토에서 공장까지 걸어서 출퇴근했다. 쉰들러는 공장 내에 노동자들을 위한 외래 진료소, 협동조합, 부엌, 식당 등을 설치하며 시설을 확장했다.

1943년 3월, 크라쿠프 게토가 해체되면서 유대인들은 플라슈프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쉰들러는 평소 술친구이기도 했던 잔혹한 수용소 소장 아몬 괴트를 설득하여, 자신의 공장 부지 내에 유대인 노동자들을 위한 막사를 짓도록 허락받았다. 이를 통해 그는 유대인 노동자들에게 비교적 안전한 환경과 추가적인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식량은 대부분 암시장에서 조달했다. 친위대 경비병들은 공장 부지 출입이 금지되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에말리아 수용소에 있던 그의 노동자들은 플라슈프의 다른 수감자들과 달리 상대적으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고, 절멸 수용소로 이송되지 않았다. 쉰들러는 규정 위반과 유대인 보호 혐의로 게슈타포의 조사를 받기도 했으나, 유대인 구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3. 2. 플라쇼프 강제 수용소

1943년 3월 13일, 나치 독일은 크라쿠프 게토를 폐쇄했다. 노동이 가능하다고 판단된 유대인들은 새로 건설된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이하 플라쇼프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노동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이들은 절멸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게토 정리 과정에서 거리에서 살해당했다. 쉰들러는 국방군 내 연락망을 통해 이 계획을 미리 파악하고, 자신의 공장 노동자들이 해를 입지 않도록 공장에서 밤을 보내게 조치했다. 그는 게토가 잔혹하게 폐쇄되는 과정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플라쇼프 수용소는 쉰들러의 에나멜 공장(DEF)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1943년 3월 문을 열었다. 수용소 책임자는 친위대-하우프슈투름퓌러 아몬 괴트였는데, 그는 수감자들을 이유 없이 살해하는 등 극도의 잔혹함으로 악명이 높았다. 플라쇼프의 유대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다. 오스카르 쉰들러의 아내 에밀리 쉰들러는 괴트를 "내가 만난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후요바 구르카(Hujowa Górka, "자지 언덕"), 크라쿠프-플라쇼프 강제 수용소의 처형 장소 (2007)


괴트는 쉰들러의 공장을 포함한 모든 공장을 수용소 내부로 이전시키려 했다. 그러나 쉰들러는 외교술과 아첨, 그리고 상당한 양의 뇌물을 동원하여 이를 막아냈다. 더 나아가 그는 괴트를 설득하여 자신의 비용으로 DEF 공장 부지 내에 '에말리아'(Emalia)라고 불리는 하위 수용소를 건설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이 하위 수용소에는 쉰들러 공장의 유대인 노동자들과 인근 다른 공장에서 온 450명의 유대인들이 함께 수용되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괴트의 무자비한 학살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쉰들러는 이들에게 충분한 식량과 숙소를 제공했으며, 심지어 유대교 종교 의식을 치르는 것도 허용했다. 필요한 식량은 쉰들러가 암시장을 통해 직접 조달했으며, 친위대 경비병들은 에말리아 수용소 부지 내로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쉰들러는 유대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게슈타포가 위조 신분증을 가진 유대인 가족을 넘기라고 요구했을 때도 이를 거부했으며, 노동자들이 절멸 수용소로 이송될 위기에 처하면 그들이 공장 운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인력이라고 주장하며 이송을 막았다. 그는 아이나 대학생을 숙련된 금속 기술자라고 속이거나 관련 기록을 위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위험한 활동 때문에 쉰들러는 암시장 거래, 뉘른베르크법 위반(공개 장소에서 유대인 소녀에게 친절을 베푼 행위), 괴트를 비롯한 나치 관리들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 등으로 여러 차례 체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영향력 있는 인맥 덕분에 풀려날 수 있었다. 한편, 아몬 괴트 자신도 1944년 9월 13일 부패 및 권력 남용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전쟁의 혼란 속에서 결국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았다.

쉰들러의 노력 덕분에 에말리아 하위 수용소의 유대인 노동자들은 구타나 부당한 죽음을 피할 수 있었고, 아무도 절멸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았다.

3. 3. 브르뷘리츠로의 이전

2004년 브르네네츠 노동 수용소 옛터에 있는 쉰들러의 공장


1944년 7월, 동부 전선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붉은 군대가 빠르게 접근해오자, 나치 친위대(SS)는 동쪽에 위치한 최전방 강제 수용소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남은 수감자들은 서쪽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 등으로 강제 이송되었다. 당시 크라쿠프-플라슈프 강제 수용소 소장 아몬 괴트의 개인 비서였던 미에테크 펨퍼는 쉰들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했다. 나치가 전쟁 수행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모든 공장을 폐쇄할 계획이라는 것이었다. 펨퍼는 유대인 노동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쉰들러에게 공장의 생산 품목을 기존의 조리 기구에서 대전차 수류탄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쉰들러는 자신의 모든 수완과 뇌물을 동원하여 괴트와 베를린의 나치 관료들을 설득했다. 그는 자신의 공장과 유대인 노동자들을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계 주민 거주 지역이었던 주데텐란트의 브르네네츠( Brněneccs )로 옮길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냈다. 이는 노동자들을 가스실에서의 죽음으로부터 구해낼 결정적인 조치였다. 유대인 게토 경찰 장교였던 마르셀 골드베르그가 제공한 이름을 바탕으로, 펨퍼는 1944년 10월 브르네네츠로 이송될 1,200명의 유대인 명단, 즉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하고 타이핑했다. 이 명단에는 쉰들러의 기존 노동자 1,000명과 인근 율리우스 마드리치의 섬유 공장에서 온 수감자 200명이 포함되었다.

1944년 10월 15일, 명단에 오른 700명의 남성 노동자들을 태운 기차는 먼저 그로스-로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들은 그곳에서 약 일주일을 보낸 후, 목적지인 브르네네츠의 새 공장으로 다시 이송되었다. 그러나 300명의 여성 ''쉰들러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 가스실에서 처형될 위기에 처했다. 쉰들러의 평소 인맥과 뇌물 공세도 이번에는 쉽게 통하지 않았다. 절박한 상황에서 쉰들러는 그의 비서 힐데 알브레히트에게 암시장에서 구한 물품, 음식, 다이아몬드 등 막대한 뇌물을 가지고 아우슈비츠로 보냈다. 끈질긴 협상과 설득 끝에, 여성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몇 주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풀려나 브르네네츠로 이송될 수 있었다.[16] 이 과정에서 쉰들러는 유대인 1인당 하루 7 라이히스마르크게슈타포에게 지불하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이는 절멸 수용소 운영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이 집단적으로 빠져나온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쉰들러는 250대의 화물차 분량의 기계 설비와 원자재를 새 공장으로 옮겼다. 하지만 이 공장에서는 실제로 사용 가능한 포탄이 거의 생산되지 않았다. 병기부 관계자들이 낮은 생산량에 의문을 제기하자 쉰들러는 암시장에서 완제품 포탄을 구매하여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된 것처럼 속여 납품했다. 친위대가 제공한 식량은 노동자들의 생존에 턱없이 부족했으므로, 쉰들러는 대부분의 시간을 크라쿠프를 오가며 음식, 무기 및 기타 물품들을 암시장에서 구해왔다. 그의 아내 에밀리 쉰들러는 브르네네츠에 남아 몰래 추가 식량을 확보하고, 노동자들의 건강 및 기타 기본적인 필요를 돌보았다.

쉰들러의 구출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주데텐란트의 작은 섬유 공장들로 최대 3,000명의 유대인 여성들을 이송시키는 일을 주선하여 그들의 생존 가능성을 높였다. 1945년 1월에는 더욱 극적인 구조가 이루어졌다. 점령된 폴란드의 고레쇼프에 있는 독일 광산에서 노동자로 거부된 250명의 유대인들을 태운 기차가 브르네네츠에 도착했다. 혹한 속에 운송되어 화물칸 문이 얼어붙었다. 에밀리 쉰들러는 공장 기술자가 납땜 인두로 문을 녹여 열 때까지 기다렸다. 화물칸 안에서 12명이 동사했고, 살아남은 107명 역시 너무 아프고 쇠약해서 일할 수 없는 상태였다. 에밀리는 생존자들을 공장으로 옮겨 임시 병원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돌보았다. 쉰들러는 친위대가 동사한 유대인들을 소각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토지를 구입하여 유대교 관습에 따라 매장해주었다.

전쟁 막바지, 붉은 군대가 브르네네츠로 점점 다가오자 쉰들러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계속 뇌물을 주어 자신의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것을 막았다. 1945년 5월 7일, 쉰들러와 그의 노동자들은 공장 바닥에 모여 라디오를 통해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나치 독일의 항복과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을 알리는 방송을 들었다. 플라슈프에서 브르네네츠로 옮겨온 쉰들러의 노동자들 중에서는 부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거나 절멸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쉰들러는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쏟아부어 단 1페니히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전후 활동 및 말년

나치당과 독일 국방군 정보기관인 아프베어의 일원이었던 쉰들러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전범으로 체포될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그가 구해낸 유대인 중 은행가였던 이츠하크 슈테른 등 몇몇은 쉰들러가 유대인의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는 내용의 진술서를 준비하여 미국 측에 제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16]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플라쇼프 수용소가 해체된 후 ''쉰들러 유대인''들은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시로 기념품을 주기로 결정했다. 노동자들 사이에서 아이디어를 모았고, 그들 중 보석 세공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몬 예레트(Szymon Jeret)는 자신의 금니 브릿지를 제공했다. 이 금니와 몇 개의 은화를 녹여 반지를 만들기로 했다. 보석 세공업자 요제프 그로스(Józef Gross)는 납 파이프 조각으로 반지의 원형을 만들고, 갑오징어 뼈를 이용해 주형을 제작했다. 이 주형에 녹인 금을 부어 반지를 만들고, 표면을 갈고 광택을 냈다. 반지에는 히브리어탈무드의 구절인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한다"라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그로스는 이 반지의 주형과 납 원형을 평생 보관했으며, 현재는 멜버른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반지의 행방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소련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쉰들러와 그의 아내 에밀리호르히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그의 정부 마르타와 몇몇 유대인 노동자, 그리고 암시장 물품을 실은 트럭이 뒤따랐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미 점령한 체스케 부데요비체에서 호르히 자동차를 압수했고, 쉰들러 부부는 좌석 아래 숨겨둔 다이아몬드를 되찾지 못했다. 그들은 기차와 도보로 이동하여 레노라에서 미군과 합류했고, 파사우를 거쳐 한 미국인 유대인 장교의 도움으로 스위스행 기차를 탈 수 있었다. 1945년 말, 그들은 독일 바이에른으로 이주했다.

쉰들러가 레겐스부르크에서 살았던 집의 기념 명판


예루살렘에 있는 쉰들러의 묘. 히브리어 비문에는 "열방의 의인"이라고 적혀 있고, 독일어 비문에는 "1200명의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라고 적혀 있다.


전쟁 중 유대인 노동자들을 구하기 위해 뇌물과 암시장 물품 구매에 전 재산을 쏟아부은 쉰들러는[16] 전쟁 후 사실상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는 잠시 레겐스부르크뮌헨에 머물렀지만(레겐스부르크에는 그가 거주했던 건물 벽에 기념 명판이 남아있다), 전후 독일에서 사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유대인 단체의 지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8년, 그는 전쟁 중 지출한 비용에 대한 상환을 미국 유대인 연합 분배 위원회에 청구하여 15000USD를 받았다. 그는 수용소 건설 비용, 뇌물, 식량 등 암시장 물품 구매에 105.60000000000001만달러 이상을 지출했다고 추산했다.

1949년, 쉰들러는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여 닭과 모피용 동물인 뉴트리아 사육 사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1958년 사업이 파산하자 아내 에밀리를 남겨두고 홀로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도 시멘트 공장 운영 등 여러 사업을 시도했지만 실패를 거듭했고, 1963년에는 파산을 선언했다. 이듬해에는 심장마비를 겪어 한 달간 입원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 인연을 맺었던 슈테른, 페퍼버그를 비롯한 많은 유대인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했으며, 전 세계의 ''쉰들러 유대인''들이 보내주는 기부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말년에 쉰들러는 프랑크푸르트예루살렘을 오가며 생활하는 "이중 생활"을 했다. 그는 1974년 10월 9일 독일 힐데스하임에서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본인의 희망에 따라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있는 가톨릭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나치당 당원 중 유일하게 이곳에 묻힌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전쟁 중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5월 8일, 야드 바쉠의 열방의 의인 가든에 그의 이름으로 캐럽나무를 심는 행사에 그를 초청했다. 1965년 11월 5일에는 독일 연방 공로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받았다.[22] 1993년 6월 24일, 쉰들러와 그의 아내 에밀리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을 구출한 비유대인에게 이스라엘이 수여하는 열방의 의인으로 함께 선정되었다.[23] 쉰들러는 카를 플라게,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덕비츠, 헬무트 클라이니케,[1] 그리고 한스 발츠[2] 등과 함께 이 상을 받은 소수의 나치당원 중 한 명이다.

1948년에 쉰들러를 인터뷰한 작가 허버트 스타인하우스(Herbert Steinhouse)는 "쉰들러의 특별한 행동은 우리 시대가 진심으로 믿기 어려워하는 기본적인 예의와 인간성에서 비롯되었다. 회개한 기회주의자는 빛을 보고, 그를 둘러싼 가학성과 사악한 범죄에 반항했다."라고 평가했다. 1983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쉰들러는 "나는 유대인들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들을 도와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인용되었다. 그러나 옛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그가 독일 국방군에서 복무하고 주데텐란트에서 독일 분리주의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브르네네츠에 있는 그의 공장 부지를 박물관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재정 지원 부족으로 실패했다.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쉰들러가 거주했던 건물 벽에 있는 기념 명판


쉰들러의 이야기는 1982년 호주 작가 토마스 키닐리가 쓴 논픽션 소설 『쉰들러의 방주 1200명의 유대인을 구한 독일인』(원제 ''Schindler's Ark''[17], 미국 제목 ''Schindler's List''[18])이 부커상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이를 영화화한 《쉰들러 리스트》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9년, 그의 마지막 연인 아미 스페트(Ami Spaeth)의 집 다락방에서 쉰들러가 작성한 서류가 담긴 가방이 발견되었다. 이 서류에는 그가 친위대에 접근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지출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식량, 뇌물, 선물 등으로 지불한 총액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만유로에 달했다.

쉰들러는 1957년 이후 아내 에밀리에와 소원해졌으며,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만나지 않았다. 에밀리에는 남편 사후 20년이 지난 뒤 그의 묘 앞에서 "이제야 만났네... 왜 나를 버렸는지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당신이 죽고 내가 늙어도, 둘이 결혼한 채인 것은 변하지 않고, 그렇게 둘은 하느님 앞에 있어. 당신을 모두 용서했어, 전부..."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19] 만년에 에밀리에는 아르헨티나 산 비센테에서 애완동물들과 함께 살았으며, 반유대주의 극우 과격파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아르헨티나 경찰의 24시간 보호를 받았다.[19] 2001년 7월 베를린 방문 중, 그녀는 인생의 마지막을 독일에서 보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고,[20] 같은 해 10월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9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뮌헨 근처 발트크라이부르크(Waldkraiburg)의 묘지에 묻혔으며, 묘비에는 "한 사람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한다.(Wer einen Menschen rettet, rettet die Ganze Welt.)"라는 글귀가 독일어로 새겨져 있다.[21]

2008년 4월 10일, 오스카 쉰들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에서 1.45EUR 특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이 우표에도 탈무드의 구절("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한다")이 적혀 있다.[24]

5. 유산 및 평가

역사학자 데이비드 M. 크로는 《오스카 쉰들러: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인생, 전쟁 기간의 활동과 리스트의 전모》를 통해 쉰들러가 처음에는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나치 당원들에게 로비를 했을 뿐 유대인들을 구출하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들이 모두 반박되면서, 이 주장은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플라쇼프 수용소가 해체된 후, ''쉰들러 유대인''들은 쉰들러에게 감사의 표시로 기념품을 주기로 결정했다. 유대인 노동자 중 한 명인 시몬 예레트가 자신의 금니 브릿지를 제공했고, 다른 은화와 함께 녹여 금 반지를 만들었다. 보석 세공업자 요제프 그로스는 갑오징어 뼈를 이용해 만든 틀에 금을 부어 반지를 제작하고, 탈무드의 구절 "한 생명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한다"를 히브리어로 새겨 넣었다.[3][4] 이 반지의 실제 행방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5] 그로스가 제작 과정에서 사용했던 납 마스터 인장과 갑오징어 뼈 몰드는 현재 멜버른 홀로코스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쟁 중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5월 8일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은 쉰들러를 초청하여 열방의 의인 가든에서 그를 기리는 캐럽나무를 심는 행사를 열었다.[6] 1965년 11월 5일에는 독일 연방 공로 훈장 대십자장을 수여받았다.[7] 1974년 10월 9일 쉰들러는 간부전으로 사망했으며,[8] 나치당 당원으로는 이례적으로 예루살렘시온산 가톨릭 묘지에 묻혔다.[9][10] 1993년 6월 24일, 그와 그의 아내 에밀리 쉰들러는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유대인을 구한 공로로 야드 바셈으로부터 열방의 의인으로 함께 선정되었다.[11] 쉰들러는 카를 플라게,[12]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덕비츠,[13] 헬무트 클라이니케,[1] 그리고 한스 발츠[2]와 더불어 이 상을 받은 소수의 나치당원 중 한 명이다.

1948년 쉰들러를 인터뷰한 작가 허버트 스타인하우스는 "쉰들러의 특별한 행동은 우리 세련된 시대가 진심으로 믿는 경우가 거의 없는 기본적인 예의와 인간성에서 비롯되었다. 회개한 기회주의자는 빛을 보고, 그를 둘러싼 가학성과 사악한 범죄에 반항했다."라고 평가했다.[9] 1983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는 쉰들러가 "나는 유대인들이 파괴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그들을 도와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라고 말했다고 인용되었다.[14]

그러나 옛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에서는 그의 평판이 엇갈린다. 그는 독일 국방군 첩보원으로 활동했고 주데텐란트에서 독일 분리주의를 지지했던 과거 때문에 부정적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브르네네츠에 있는 그의 옛 공장 부지를 박물관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재정 지원 부족으로 실패했다.[15]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감독


쉰들러의 이야기는 1951년 폴데크 페퍼버그가 영화 감독 프리츠 랑에게 영화 제작을 제안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페퍼버그의 주도로 1964년 쉰들러는 제안된 영화 시나리오 "마지막 시간까지(To the Last Hour)"에 대해 MGM으로부터 1964년 당시 2만달러를 선불로 받았다. 두 영화 모두 제작되지 않았고, 쉰들러는 MGM에서 받은 돈을 금세 다 써버렸다. 그는 또한 1960년대에 독일의 MCA와 비엔나의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으로부터도 제안을 받았지만, 이 역시 아무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1980년, 호주 작가 토마스 키닐리는 베벌리힐스에 있는 페퍼버그의 여행 가방 가게를 우연히 방문했고, 페퍼버그는 그에게 쉰들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키닐리에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 사본을 건네주었고, 키닐리는 이 이야기를 소설화하기로 결정했다. 광범위한 조사와 생존한 "쉰들러 유대인"(Schindlerjuden|쉰들러유덴de)과의 인터뷰를 거쳐 그는 1982년에 출간된 역사 소설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 미국에서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로 출간)를 썼다.

이 소설은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로 각색되었다. 스필버그는 10년 전에 영화 판권을 확보했지만, 정서적, 전문적으로 이 영화를 다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느껴 다른 여러 감독에게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나중에 마틴 스코세지를 위해 스티븐 자일리언이 준비한 이 프로젝트의 시나리오를 읽고, 그는 쉰들러 전기 영화를 제작할 기회를 얻기 위해 그와 《케이프 피어》를 교환하기로 결정했다. 영화에서 이츠하크 슈테른(벤 킹슬리 분)은 실제 슈테른, 반키어, 펨퍼 등 여러 인물을 조합한 인물이다. 리암 니슨은 쉰들러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이 영화는 아카데미상 7개 부문에서 수상했으며, 그 중에는 아카데미 작품상도 포함되었다.

다른 영화로는 존 블레어가 템스 텔레비전을 위해 제작한 1983년 영국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쉰들러: 그가 구한 실제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이야기"(Schindler: His Story as Told by the Actual People He Saved, 미국에서는 1994년에 "쉰들러: 진짜 이야기"(Schindler: The Real Story)로 개봉)와 1998년 A&E 바이오그래피 특별 프로그램 "오스카 쉰들러: 리스트 뒤의 남자"(Oskar Schindler: The Man Behind the List)가 있다.

체코 스비타비에 있는 쉰들러 기념비, 그의 출생지


1974년 사망한 힐데스하임에 있는 쉰들러 기념비


1997년, 역사적인 사진과 문서가 들어있는 쉰들러의 가방이 힐데스하임에 있는 아미와 하인리히 슈테어 부부의 아파트 다락방에서 발견되었다. 쉰들러는 1974년 사망하기 며칠 전 이 부부에게 묵었었다. 슈테어의 아들 크리스는 이 가방을 슈투트가르트로 가져갔고, 1999년 ''슈투트가르터 차이퉁''의 과학 편집자 볼프강 보르그만이 문서를 자세히 조사했다. 보르그만은 1999년 10월 16일부터 26일까지 신문에 연재된 일련의 7개의 기사를 작성했으며, 결국 책으로 출판되었다: ''Schindlers Koffer: Berichte aus dem Leben eines Lebensretters; eine Dokumentation der Stuttgarter Zeitung'' (''쉰들러의 가방: 생명 구원자의 삶에 대한 보고서''). 1999년 12월, 문서와 가방은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이스라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으로 보내졌다.[17]

2009년 4월 초, 목록의 한 버전의 탄소 복사본이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주립 도서관에서 케닐리가 수집한 자료 상자를 정리하던 작업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13페이지 분량의 이 문서의 색은 누렇고 낡았으며, 연구 노트와 신문 스크랩 사이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문서는 쉰들러의 이야기를 쓰도록 설득하기 위해 1980년 페퍼버그가 케닐리에게 건넨 것이었다. 이 목록에는 801명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1945년 4월 18일 자로 작성되었다. 페퍼버그는 노동자 번호 173번으로 등록되어 있다. 전쟁 말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름이 여러 번 다시 입력되었기 때문에, 목록의 진본은 여러 부 존재한다.[18] 목록의 현존하는 네 부 중 하나는 2013년 7월 19일부터 10일간 이베이에서 300만달러의 시작 가격으로 경매에 부쳐졌으나,[19] 입찰은 없었다.[20]

2013년 8월, 1944년 8월 22일 쉰들러가 서명한 한 페이지짜리 편지가 온라인 경매에서 59135USD에 판매되었다. 이 편지에는 쉰들러가 공장 감독관에게 기계를 체코슬로바키아로 옮기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전에 같은 익명의 경매 구매자가 쉰들러의 크라쿠프 공장 건설 문서(1943년)를 63426USD에 구매했었다.

2008년 4월 10일, 오스카 쉰들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일에서 145센트 특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이 우표에도 탈무드의 말 "한 사람을 구하는 자는 온 세상을 구한다"가 적혀 있다.[21]

참조

[1] 웹사이트 Kleinicke, Helmut https://righteous.ya[...] Yad Vashem 2023-07-07
[2] 웹사이트 Walz, Hans https://righteous.ya[...] Yad Vashem 2023-07-07
[3] 문서 David Crowe,P2
[4] 문서 ミーテク・ペンパー、158頁
[5] 문서 David Crowe,P3
[6] 문서 David Crowe,P4
[7] 문서 David Crowe,P7
[8] 문서 David Crowe,P6
[9] 문서 David Crowe,P4
[10] 문서 David Crowe,P6
[11] 문서 David Crowe,P9
[12] 문서 David Crowe,P7
[13] 문서 David Crowe,P8
[14] 문서 David Crowe,P11
[15] 문서 E.ブレッチャー著『私はシンドラーのリストに載った』19ページ
[16] 서적 Der rettende Weg, Schindlers Liste – die wahre Geschichte Hoffmann und Campe
[17] 서적 Schindlers ark Norstedt
[18] 서적 Schindler's list Touchstone
[19] 웹사이트 Emilie Schindler http://www.auschwitz[...] 2019-02-03
[20] 뉴스 Emilie Schindler, 93, Dies; Saved Jews in War http://query.nytimes[...] 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 2001-10-08
[21] 서적 Oskar Schindler: The Untold Account of His Life, Wartime Activities, and the True Story Behind the List Westview Press
[22] 웹사이트 "Vater Courage – Oskar Schindler in Frankfurt“ auf hr-online http://www.hr-online[...] 2009-02-03
[23] 웹사이트 Oskar and Emilie Schindler https://www.yadvashe[...] Yad Vashem. The World Holocaust Remembrance Center 2019-02-03
[24] 웹사이트 Bundesministerium der Finanzen: 100. Geburtstag Oskar Schindler http://www.bundesfin[...] 2019-02-03
[25] 서적 英国人記者が見た連合国戦勝史観の虚妄 祥伝社 2013-12-02
[26] 학술지 War and an unlikely hero:Schindler of Nanjing https://www.independ[...] 英国[[インデペンデント]]誌電子版 2006-07-24
[27] 서적 Der gute Deutsche von Nanking Deutsche Verlags-Anstalt
[28] 서적 The Good Man of Nanking: The Diaries of John Rabe A.A. Knopf : Distributed by Random House 1998-11
[29] 서적 南京の真実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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